경주 분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원효(617~686)와 자장(590~658)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 자장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대장경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이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고,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셨으며, 그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에도 있었다고 한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제작한 30만6,700근(184톤) 규모의 대형 약사여래입상이 있었는데,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분황사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우물)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분황사 입구 남쪽에 세워져 있으며 2021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가 황룡사지와 가까이 위치하여 한때 황룡사지의 당간지주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황룡사지 입구 쪽에 파손된 당간지주가 있고, 신라시대 분황사 가람의 규모와 배치 등을 고려할 때, 분황사의 당간지주가 확실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보리밭

경주시는 매년 황룡사지와 분황사 사이의 빈터에 보리를 심는데, 4월 말이면 청보리밭이었다가 5월 중순이면 황금보리밭이 되면서 이 일대는 사진 찍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다.
정문

일주문 없이 담장 사이에 대문을 세웠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짓고,

분황사 현판을 걸었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날 분, 황제 황으로 향기나는 황제의 절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신라 최초의 여왕이 등극한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절이다.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은 원래 7층 혹은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높이 9.3m의 3층만 남아있다.

분황사 창건 당시 제작된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다가 오히려 더욱 파손시킨 것을 1915년에 다시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막돌을 쌓아 조성한 기단 위에는 네 귀퉁이에 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1층의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고,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하여 모전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꼭대기 중앙에 연꽃 장식을 올렸다.
화쟁국사비부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원효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고려 명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1817년 추사 김정희가 무장사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를 찾았을 때 분황사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로 차화정국사지비월(此和靜國師之碑跀) 이라고 귀부에 새겨 놓았다.
원래는 차화쟁국사지비부( 此和諍國師之碑趺)라 해야 하는데, 쟁(諍)을 정(靜)으로 잘못 썼고, 월(跀)은 부(趺)의 다른 글자로 보고 있다.
비는 임진왜란 이후에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은 것으로 1979년 경북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삼룡변어정

우물의 외부는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으로 조성되었는데, 외부의 팔각은 팔정도를 상징하고,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신라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이 우물에 사는 용을 물고기로 변화시켜 잡아가자 이를 알고 쫓아가 빼앗아 가져왔으며, 그 후로 삼룡변어정이라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는데, 이후 이곳에서 출토된 불두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으며, 모전석탑의 1층 감실 안에는 목이 없는 불상들이 있다.
보광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원년(1608)에 중창하였고, 숙종 6년(1680)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에 보광전 현판을 걸었다.
금동약사여래입상

1998년 보광전 해체 수리 과정 중 묵서가 확인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에 5,360근(3.2t)의 동을 모아 제작한 대형 불상임이 확인되었으며, 202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분황사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약사도량으로서 그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처럼 장대한 규모로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54m 높이의 약사여래불은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왼손으로 약함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아래를 향해 중지를 살짝 굽힌 모습으로 서 있다.
원효대사


보광전 약사여래불 좌측에 원효(617~686) 대사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셨으며,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도 원효의 소상이 분황사에 있었다고 한다.
사리탑

대원심 보살 월성 최씨 순이(1860~1935)가 살아 있을 때인 1933년 치아에서 부처 모양의 백옥 사리가 나오자, 그 불심을 기리고져 사리를 이 탑에 봉안하였다.
종각


경내 입구에 정면 2칸, 측면 1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전각을 짓고 범종을 걸었다.

분황사의 나무가 왕성하다.
경주 분황사 찾아가는 길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련결사 기도 도량 강진 백련사 (6) | 2025.04.01 |
---|---|
백제불교 초전 성지 영광 불갑사 (2) | 2025.03.30 |
안동 봉정사 (0) | 2025.03.25 |
마라난타가 창건한 불교 초전 성지 나주 불회사 (0) | 2025.02.23 |
유물이 넘쳐 나는 지장 도량 남해 호구산 용문사 (0) | 2025.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