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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마라난타가 창건한 불교 초전 성지 나주 불회사

전남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덕룡산에 자리한 불회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366년(동진 태화 원년, 백제 근초고왕 21년)에 창건하였고, 656년(당 현종 원년, 백제 의자왕 16년)에 신라의 희연 조사가 중창하였다는데 고증할 만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원진 국사가 3창하였으나 이후 세 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였고, 1798년(정조 22년)의 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자 지명 스님이 1799년부터 중건하여 1808년에 중창을 끝내고 부처가 다시 모였다는 뜻으로 이름을 불회사(佛會寺)로 바꾸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불회사의 이전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몇 개의 전각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정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 1991년부터 25년 간의 불사를 통해 모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의 커다란 일주문에 초전 성지 덕룡산 불회사 현판을 걸어, 맨 처음 불교가 전해진 곳임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영광 불갑사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처음 지은 절이라고 한다.

 

아마도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와 백제인에게 불교를 제일 먼저 소개한 곳은 나주 불회사가 있는 곳이고, 그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하다가 처음으로 지은 절은 영광 불갑사인 모양이다.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좌측에 승탑 2기와 탑비가 서 있다.

좌측은 도암당 승탑이고, 우측은 청암당 학능 스님의 승탑과 탑비이다.

 

도암당이 누구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고 승탑의 형태를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청암당 학능은 백양사 주지로 지내다 입적한 뒤 나주가 그의 고향이라는 인연으로 이곳에 승탑과 탑비를 세웠다.

 

석장승

 

승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길 양쪽에 1719년(조선 숙종 45년)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장승이 마주 보며 서 있다.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이 석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며, 또한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수문신상으로, 1968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원당장군

 

머리 위에 상투모양을 하고 턱 밑에 수염이 조각된 남장승의 앞면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고 새겨져 있고

 

상원주장군

 

입꼬리를 귀밑까지 올려 온화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을 한 여장승의 앞면에 주장군(周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장군의 정식 명칭은 상원주장군이다.

 

비자나무숲

 

일주문에서 사찰로 가는 길은 수령이 300~400년 정도 된 전나무, 삼나무, 비자나무 등 약 3천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이 길을 걸으면 여름날 청량감으로 상쾌하고, 늦가을 단풍은 그 빛깔이 고와 아늑하고 화려하며, 대웅전 뒤로 이어진 동백나무숲은 이른 봄날 붉은 꽃이 손짓하니 어느 때와도 마음 편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사적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의 용이 고개 돌려 바라보는 곳이 궁금하여 나도 따라 쳐다보니

 

담장 사이에 사찰로 들어가는 문이 서 있고, 정면에 덕룡산 불회사 현판이 걸려있다.

 

진여문

 

진여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기둥만 두고 벽 없이 개방된 채 세로로 세웠으며,

 

진여문에 달린 문짝에 검을 휘두르는 모습의 금강역사와 주먹으로 내리치는 모습의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천왕문

 

진여문과 천왕문 사이의 보에 천왕문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에는 사천왕이 탱화로 그려져 있다.

 

천왕문 내부에는 우측에 비파를 연주하는 북방 다문천왕과 검을 든 동방 지국천왕이 배치되었고,

 

좌측에는 용을 붙잡고 여의주를 쥔 남방 증장천왕과 삼지창을 쥐고 탑을 받쳐 든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두 번째 산문인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한 주심포집으로 지었으며, 앞의 진여문과 이어붙여 T자 형태를 한 매우 독특한 산문으로 세워져 있다.

 

대양루

 

천왕문 앞에 사찰의 마지막 산문인 누각이 거대한 모습으로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터에는 대양문이 있었으나 2000년에 지금 건물로 신축하고,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을 역임한 서옹 상순(1912~2003) 스님이 쓴 대양루(大陽樓) 현판을 걸었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전면은 2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단층이며,

 

1층은 통로를 비롯해 좌우에 종무소와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비로다경실이 있고, 2층은 천수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수전은 법회나 행사를 하기 적합한 강당으로 건축되었고, 내부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천수천안 십일면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뒤에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 및 사천왕이 조각된 목각탱을 걸었다.

보물
나주 불회사 대웅전

 

대웅전은 1799년(조선 정조 23년)에 중건된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다포집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여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가치가 있어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높게 세워져 있으며, 지붕 귀퉁이를 활주로 들어 올려 공포와 단청의 화려함을 숨김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현판 아래 관음대참회도량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진행할 때, 원형 보존을 위해 기존 재료인 육송을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는데, 업체가 육송을 사용하지 않고 값싼 수입 목재를 사용해 부당이득을 취했으니 육송을 사용해 복원을 할 때까지 끊임없는 참회를 하겠다는 속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대웅전 가운데 칸의 기둥에 설치된 용두형 안초공의 바깥 머리 부분은 단청이 깨끗하여 생동감이 있는 반면, 내부의 꼬리 부분은 퇴색되어서인지 용꼬리가 아니라 인어꼬리처럼 보인다.

 

천장 가운데에 연꽃이 그려진 우물천장이 가설되었고, 그 밑으로 가로지르는 보 사이에 보궁형 닫집을 장엄하였으며,

 

아래에 마련된 불단 위에는 삼존불과 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좌우에 소통을 세우고 불단 뒤에 윤장대를 설치하였다. 

 

천장 아래 보에는 두 마리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한마리는 물고기를 입에 물었고, 다른 한 마리는 물고 있던 여의주를 땅에 떨어뜨렸는지 입만 벌리고 있으며,

 

연꽃이 그려진 우물천장 옆으로 서까래가 있는 곳에 설치한 판장에는 물고기를 가둔 8자 모양의 틀과 함께 게가 조각되어 있고, 옆으로 뱀처럼 보이는 용이 지나가고 있다.

 

보물
나주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비로자나불이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주먹을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에는 화려한 보관을 쓴 문수, 보현보살이 기다란 연꽃 가지를 두 손으로 쥐고 서서 협시하고 있다. 

 

비로자나 삼존불은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에 따라 조성한 15세기 조선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지만 제작 방식이 달라,

 

건칠 방식으로 제작된 비로자나불은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소조로 제작된 좌우 보살은 2005년 전남 유형문화유산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건칠 불상이란 나무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여러 겹 바른 뒤 옻칠을 하여 굳으면 내부의 나무 틀은 제거하고 껍질인 삼베만 남겨 만든 불상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널리 유행하였는데, 전각에 불이 날 경우 불상이 무거워 옮기지 못하자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건칠 불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설법인의 수인을 한 노사나불과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배치된 삼신탱화이다.

 

소통

 

소통이란 발원 의식을 하는 동안 발원문을 넣어두는 통으로

 

소통 안에 축원할 내용을 적은 발원문을 넣었다가 의식이 끝난 뒤, 발원문을 꺼내어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소지 의식을 한다.

신중탱화

 

신중단에는 1973년에 조성된 신중탱화가 걸려있다.

 

상단에 동진보살을 두고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하였으며, 천부, 명왕, 천룡팔부 등 여러 권속을 그렸다.

 

명부전

명부전은 대웅전 우측에 단을 낮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었으며,

 

내부에 ㄷ자 형태의 불단을 조성하고 지장삼존과 열 분의 시왕을 안치하였다.

 

머리띠를 두른 지장보살이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으로 법륜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육환장을 쥐었고,

 

좌측의 도명존자는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우측의 무독귀왕은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채 협시하며 서 있다.

 

지장 삼존상 좌측에 다섯 시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동자 3구를 안치하고 가장 끝에 인왕을 세웠으며,

 

우측에도 다섯 시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동자 3구를 안치하고 가장 끝에 인왕을 세웠다.

 

극락전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2013년에 건립되었으며,

 

측면에 문을 내고 극락전 현판을 걸었다.

 

불단 위에는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아미타불과 함께 좌우에 2창주 희연조사 위패와 4창주 지명 스님의 위패를 봉안하고, 

 

뒤에는 아미타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내부 벽에는 영가가 안치되어 있다. 

 

나한전

 

대웅전 향 좌측 언덕 위에 나한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세워져 있다.

 

전각 내부에는 ㄷ자 형태의 불단 위에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이 안치되어 있고,

 

원진국사 진영이 걸려있다.

 

그런데 우측의 위패를 보니

 

제3창주 려말선초 원진국사 각령이라고 적혀있는데, 아마도 려충선효(麗忠鮮孝) 를 잘못 적은 듯하다.

 

고려 말기 나주 출신의 조한룡(?~1415)이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조선이 내린 상서의 벼슬을 버리고 불교에 입문하였다가 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조선의 벼슬길에 올라 승지를 역임하고 참의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로부터 보의장군 관직을 받고 돌아왔다.

 
이에 태종이 1404년(태종 4년)에 조한룡이 태어난 곳을 효자리라 하고 려충선효(麗忠鮮孝)라는 보의장군 효자비를 세웠다.

 

이후 어머니가 죽자 가야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년) 불회사를 3창하고, 화순 만연사 법당을 중건한 뒤 원진 국사(元禛國師)의 법호를 얻었으며, 1414년(태종 14년) 입적하자 청간(淸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원진 국사(元禛國師)를 원정 국사(元禎國師)라고도 하는데 진(禛)과 정(禎)이 유사하여 혼동한 듯하다.

 

참고로 나주 불회사에 있는 원진 국사(圓眞國師) 승탑은 불회사 3창한 원진 국사(元禛國師)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삼성각


나한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어졌으며,

 

전각 안에 칠성탱화, 산신탱화, 용왕탱화를 걸었다.

 

칠성탱화

 

칠성탱화는 1979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가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금륜을 받쳐 들고 오른손을 올려 설법인의 수인을 하였으며, 좌우에 붉은 구슬이 있는 보관을 쓴 일광보살과 흰 구슬이 있는 보관을 쓴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주위에는 칠여래, 칠원성군, 남극노인성, 자미대제 등이 에워싸고 있다.

 

산신탱화, 용왕탱화

 

산신탱화(좌)는 1979년에 제작된 것으로,

부채를 든 산신이 암반 위에 반가좌로 앉아 호랑이와 같이 우측을 바라보고, 차를 쟁반에 받쳐 올리는 동자, 공양물을 쟁반 위에 받쳐 든 천녀, 또 그 천녀를 바라보는 천녀가 표현되었고,

 

용왕탱화(우)는 19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넘실대는 푸른 바다 위에서 여의주를 든 용왕이 용을 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범종각

 

중정 왼쪽으로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었으며, 전각 안에는 사물이 비치되어 있다.

 

요사채

 

나한전 좌측 담장 너머로 스님의 생활 공간인 응향각이 자리하고,

 

응향각 뒤로 수행 공간인 비로선원과 비로헌이 있으며,

 

누각 우측으로 현대식 2층 건물인 공양간이 세워져 있다.

 

전남 유형문화유산
원진 국사 승탑

 

고려 중기의 고승 원진 국사(1171~1221)의 사리탑으로, 탑신 아래에 연우 4년 정사 5월 일 입(延祐四年丁巳五月 日立)이라 새겨져 있어 1317년(충숙왕 4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1210년(고려 희종 6년)에 연법사 법회의 법주가 되어 선풍을 떨치고, 1213년(강종 2년)에 삼중대사, 1214년(고종 1년)에 선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선사가 되어 포항 보경사에 머물렀다.

 

1221년에 능엄경을 설한 뒤 팔공산 염불사로 옮겨 입적하자,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원진(圓眞)이며, 이듬해 승탑과 탑비를 보경사에 세웠다.

 

그리고 95년이 지나 나주 불회사에 그의 승탑이 조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이 원진 국사와 불회사를 3창한 원진 국사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