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다.
신라 문성왕 1년(839) 무염(801~888)이 만덕산에 절을 세우고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라 하였다.
그러나 고려 무신정권 때 승려들이 사치하고 타락하며 불교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해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희종 7년(1211)부터 고종 19년(1232)까지 21년에 걸쳐 쇠락한 만덕사를 중창한 뒤, 보현 도량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을 모아 결사를 맺었는데, 이것이 지눌의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룬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그 뒤로 120년을 이어 원묘국사, 정명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 등 고려의 8 국사를 배출하며 크게 흥하였으나 고려 말 강진을 침입한 왜구에 의해 폐허 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 세종 12년(1430) 천태종의 고승 행호(行乎) 스님이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중창하고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행호 토성을 쌓고 사찰의 기틀을 다시 세웠으며,
조선 말기에도 서산대사로 알려진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8명의 종사(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악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법맥을 이으면서 백련사가 참 세상을 염원하는 상징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백련사에서 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 때 나왔고, 조선 8종사가 배출되었으니 이로 볼 때 앞으로 4종사가 더 배출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조선 말기 이곳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이 당시 백련사 주지였던 아암 혜장선사와 종교와 나이를 뛰어넘은 교유의 공간으로 백련사를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것은 백련사의 차(茶)가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암의 소개로 정약용을 만난 대흥사의 초의선사는 차의 기능, 유래, 효능, 제작 방법 등 여러 의견을 나누면서 이를 발전시켜 차 문화를 완성하였다.
만덕산에는 고려 때부터 자생한 야생차밭이 있어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는데, 이 때문에 정약용이 이곳에 유배와 지내면서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 하였다.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숲은 고려 말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할 때 함께 조성하였는데 지금은 백련사의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되었으며, 8천여 그루의 동백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다소 이국적인 남방 쪽 나무들과 뒤섞여 자라고 있다.
일주문

다포식 공포를 한 맞배지붕의 일주문은 2014년에 건립되었으며,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寺)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부터 해탈문에 이어 만경루 앞까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길이다.
해탈문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2012년에 신축하였다.
만경루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은 2층 누각으로,
아래층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사용하고 양옆 칸은 카페와 사무실로 사용하며,

위층은 템플스테이 수련 공간으로 사용하거나 만경루 작은 음악회 등의 문화 행사 공간으로 활용한다.

만경루(萬景樓) 현판 글씨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만경루는 강진만 일대 구강포 바다를 훤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며, 남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자랑한다.
대웅보전

조선 영조 36년(1760) 화재로 소실되자 월인당 총신 스님이 1762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중수하였으며,
18세기 불교 건축의 장식화 경향을 대표하는 사례이며, 사찰 건축 관련 기록이 풍부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아 202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것으로,
현판 첫 번째 글자인 대(大)를 보면 사람이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원교의 독특한 필체이다.
공포의 간섭도 있고 대웅보전 현판도 워낙 큰 이유로, 현판을 반으로 쪼개어 공포 사이에 끼워 걸었다.

법당 안에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만덕산 백련사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기둥 위에 삽입된 용두의 뿔을 비롯해 송곳니가 무척 날카롭게 표현되었다.
내부

연꽃 문양을 그린 우물천장은 2중으로 설치되었고,

천장 곳곳에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앞쪽의 덩굴 문양이 그려진 살미는 길게 빼서 내주(內柱)의 보아지(밑받침)로 사용하고,
뒤쪽의 살미는 닭을 형상화한 것 같다.

가장 꼭대기에 봉황 머리를 두고 차례로 연꽃, 연꽃, 연밥, 연밥, 연봉을 조각하여 건축이 장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둥에 정체불명의 점박이 동물이 귀엽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반대편에는 얼핏 닭처럼 보이는 새가 도약하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삼세불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에 동방유리광정토 약사여래불과 서방정토 아미타불이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삼세불을 구성하였다.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그린 삼여래탱화이며,
삼여래 주위에 10대 제자, 12대 보살,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4구, 타방불 4구가 묘사되었다.
신중탱화

신중단에 걸려있는 신중탱화는
위태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하여 역삼각형 구도를 하고, 주위에 권속을 배치하였다.
삼장탱화

영가단에 걸려있는 삼장보살도는 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 등 3대 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도상화한 그림으로,
중앙에 천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을 협시로 세우고,
좌측에는 지지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용수보살과 다라니보살이 협시하며,
우측에는 지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삼장보살 뒤쪽 주위에 26명의 권속이 둘러싸고 있다.
요사채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팔작지붕의 육화당(좌)과 맞배지붕의 종무소(우)가 배치되었다.
명부전

대웅전 향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었으며,

전각 안에 ㄷ자 불단을 조성하고 지장삼존상을 가운데로 좌우에 시왕과 권속 등을 안치하였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광배를 등지고 지장보살이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은 위를 향하고 오른손은 아래를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하였고,
좌우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댄 도명존자와 두 손으로 경궤를 받쳐 든 무독귀왕이 협시하며,

지장 삼존상 좌측에 시왕 5인과 판관, 녹사, 사자, 인왕이 배치되었고,

우측에도 시왕 5인과 판관, 녹사, 사자, 인왕이 배치되었다.
응진전

명부전 뒤에 자리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명부전과 동일한 형태로 짓고,

응진당(應眞堂) 현판을 걸었으며, 현판 아래에는 흰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데,
보현의 상징인 코끼리를 그려 백련사가 백련결사의 보현 도량이 열렸던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주불 좌측에는 마하가섭존자를 포함한 8나한상이 배치되었으며,

우측에는 아난존자를 포함한 8나한상을 배치하여 모두 16나한상이 안치되었다.
천불전

응진전 향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짓고

누구든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가진 천불전 현판을 걸었으며,

전각 안에는 아미타 삼존불과 함께 천불을 봉안하였다.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짓고,

전각 안에는 독성탱화를 가운데로 좌우에 산신탱화와 칠성탱화를 걸었다.
독성탱화

소나무를 배경으로 독성이 책을 뒤로 한 채 염주를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쥐고 정면을 바라보며 윤왕좌로 앉아 있고,
책상 앞에는 향이 타오르고, 옆에서 동자가 차를 달이고 있다.
산신탱화

소나무 밑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과 호랑이 그리고 지팡이 끝에 물병을 매달고 있는 동자가 민화풍으로 친근하게 묘사되어 있다.
탱화 하단 화기에 소화 6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그려진 것이다.
칠성탱화

중앙에 치성광여래와 좌우에서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그려 놓고, 상단에 칠여래를 배치하고 아래에 28숙을 나열하였다.
사적비

명부전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은 보호각을 세우고 사적비를 안치하였다.

귀부만 남아 있던 것에 탄기 스님이 조선 숙종 7년(1681) 비신과 이수를 다시 제작하여 세운 것으로 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귀부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 기법도 뛰어나 고려 전기의 작풍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비신의 전, 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이 양각된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석비의 양식을 하였으며,
이수는 우진각 지붕 위에 등을 맞댄 채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혜일 대종사 비

사적비 옆에 세워져 있는 비는 동산당 혜일 스님의 비이다.
동산당 혜일(1890~1965) 대종사는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경성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용성 스님을 은사로, 성일 스님을 계사로 1913년 득도했다.
1950년대 효봉, 청담, 금오 스님 등 당대 선지식과 함께 왜색 불교를 척결하기 위한 불교 정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1954년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것을 비롯해 세 차례 종정에 추대되는 등 불교중흥과 청정승단 구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스님은 1965년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세수 76세, 법랍 52세로 원적에 들었고, 잠시 백련사 주석을 했던 인연으로 이곳에 동일당 혜일 대종사 비명이 세워졌다.
범종각

만경루 우측에 자리한 종각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석축에 의지해 지었으며, 범종각 현판을 걸고 범종을 달았다.
공양간

만경루 우측에 자리한 2층 건물은 콘크리트 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려 현대식 건축물에 불교 건축 양식이 혼합된 형태를 하였으며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불전에서 구강포 앞바다가 만경루 너머로 보인다.
강진 백련사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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