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수덕사는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에 등장하는 고찰(古刹)로, 백제의 고승 혜현(570~627)이 수덕사에 주석하며 법화경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수덕사는 사격(寺格)을 갖춘 백제시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백제 사찰로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 등 12개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수덕사 경내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이 이를 뒷받침하는 한편, 삼성각 옆에 개산조 지명법사 비가 세워져 있다.

백제 위덕왕 때 지명 법사가 수덕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며, 덕숭산 수덕사 개산조 지명법사지비라고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백제시대 혜현 법사 이후 관련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을 모방한 삼층 석탑을 비롯해 수덕사에서 출토된 고려자기와 와당 등 여러 형태의 유물을 통해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수덕사를 엿볼 수 있으며,
특히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덕산현 불우조에 '재덕숭산 사유취적불운이루(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수덕사는 대웅전 이외에 취적루와 불운루 등 2개의 누각을 지닌 대가람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웅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된 채 겨우 명맥만 이어온 수덕사는 일제강점기 때 충남 대본산인 마곡사의 말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 경허 선사의 제자 만공 스님에 의해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본찰로 평가받은 수덕사는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되었고,
또한 근대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지종찰(禪之宗刹)임이 인정되어 1984년 총림으로 승격된 뒤 이름을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 하고 만공에게서 전법을 받은 혜암 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계속해서 벽초, 원담에 이어 설정과 달하에 이르기까지 경허에서 비롯된 덕숭문중의 선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주문

수덕사로 들어오는 길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문은 각기 산문(山門)과 선문(禪門)이라는 이름으로 최근에 조성한 것인데, 수덕사의 첫 번째 산문은 바로 여기 일주문에서 시작된다.
수덕사가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된 뒤 초대 주지였던 벽초 경선(1899~1986) 스님이 경내 입구에 일주문을 조성하여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일주문 안팍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수덕사가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된 것을 축하하며 소전 손재형(1902~1981) 선생이 임인년(1962)에 쓴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와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편액으로, 두 개 모두 편액 좌측에 임인 청추 소전 손재형(壬寅 淸秋 素筌 孫在馨) 낙관이 있다.

특히 일주문 안에 걸려있는 동방제일선원 문구는 경허, 만공 스님이 근대 불교의 선(禪)을 진작시킨 선지종찰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일주문을 지탱하는 화강암 기둥 상부에는 지붕을 떠받치는 보(창방)가 걸쳐있고, 그 보가 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둥 앞뒤로 가새를 설치하였으며, 보를 장식하기 위해 앞, 뒤, 중앙에 용두를 초각해 넣었다.

현재 일주문은 부분적 보수 중이며 창방 위에 또 하나의 보를 얹은 것은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설치하기 위함이다.

여의주를 물었으면 용이고 여의주가 없으면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옳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

수덕사 일주문 기둥 위의 좌측 용은 화염이 이는 여의주를 물었지만 마주 보는 우측 용은 여의주가 없다. 이 상황은 조각하는 장인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여의주를 문 용은 직접 여의주와 접속하고, 없는 다른 한 마리는 그 힘을 호위하거나 보좌함으로써 주체와 호응자, 즉 발현과 수호의 관계이며, 여의주를 문 용은 양(陽), 없는 용은 음(陰)으로 보아 음양의 의미를 두기도 하는데,
대체로 여의주를 문 용은 법(法)을 얻은 존재이자 진리를 체득한 주체이고 여의주가 없는 용은 아직 법을 추구하며 지키고 호위하는 진행 중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법은 이미 드러나 있으나 그것을 취할지는 들어오는 자의 몫이라는 암시를 주는 상징적인 조각 형태이다.
이면 석불

일주문 좌측 해탈교 위에 이면 석불이 조성되어 있다.

하나의 돌을 깎아 두 개의 불상과 광배를 표현한 석불로,

선 미술관을 등지고 일주문을 바라보는 쪽은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이 새겨져 있고,

일주문을 등지고 선 미술관을 바라보는 쪽은 결가부좌하고 합장한 모습의 불상이다.
사적비

일주문을 막 지나면 좌측에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수덕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수덕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나혜석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1944년에 고암 이응노 화백이 수덕사로부터 구입했으며 이후 파리로 떠난 뒤 화백의 본처 박귀희가 홀로 남아 여관을 운영하다가 2001년에 사망하자 19대 주지(2003~2007 역임)였던 운경 법정 스님이 여관을 다시 매수하였고, 이어 20대 주지(2007~2011 역임)였던 옹산 법광 스님이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머리를 한 거북받침 위에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라고 새겨진 비신을 세우고 위에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사적비 앞에는 꽃무릇이 꽃을 피우고 있지만 이제는 웬만한 사찰마다 꽃무릇을 흔하게 볼 수 있어 그게 그거인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곳은 이미 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건만 여기 꽃무릇은 이제 막 피어나고 있어 이곳 기온이 특이한 모양이다.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우측은 염불원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경내로 들어가는 금강문이 자리하고 있다.
금강문 좌우로 수북한 풀밭은 목수국으로, 여름이면 목수국 꽃이 만발하여 주변이 장관을 이룬다.

금강문은 산문에 속하지 않으며 대체로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배치한다.
수덕사 금강문은 통로로 사용하는 가운데 칸을 제외한 나머지 외벽을 모두 판장으로 처리하였는데,

금강문 전면의 좌측 외벽에는 상의를 벗은 금강역사가 검을 움켜쥐고 창을 휘두르는 모습이,

우측 외벽에는 금강저를 쥔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으며,

금강문 후면의 좌측 외벽에는 연꽃을 든 쌍계머리의 문수동자가 푸른 사자를 올라탄 모습이,

우측 외벽에는 여의를 든 쌍계머리의 보현동자가 흰 코끼리를 올라탄 장면이 그려져 있고,

측면 외벽에는 하늘을 날며 생황을 불고 법고를 두드리는 비천이 묘사되어 있다.

금강문(金剛門) 편액 글씨는 수덕사 주지를 역임하고 덕숭총림 4대 방장에 추대되었던 송원 설정(1942~) 스님이 쓴 것이다.

금강문 내부 좌우에는 홍살을 세우고 그 안에 금강역사를 모셨는데,

향 좌측에 밀적금강이

향 우측에는 나라연금강이 서로 마주하며 자리하고 있다.


좌측의 푸른 바지를 입은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도 하며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의 우두머리이고, 우측의 붉은 바지를 입은 나라연금강은 입을 벌리고 있어 아금강역사라고도 하며 코끼리 백만 배의 힘을 가진 불법의 수호신이다.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한 주심포집으로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하였다.
사천왕문

금강문 뒤에 두 번째 산문인 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천왕문은 금강문과 동일한 크기와 형태로 지은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이며 외벽을 판장으로 처리한 뒤 팔부중상을 그려 넣었다.


천왕문 전면 좌우 외벽에 그려진 팔부중상 2구와


후면 좌우 외벽에 그린 팔부중상 2구를 비롯해

천왕문 좌측면 외벽의 팔부중상 2구 그리고

천왕문 우측면 외벽의 팔부중상 2구 등 모두 8구가 그려져 있다.

천왕문 정면에는 수덕사에 입산하여 수도한 법현 스님이 쓴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이 걸려있다.

천왕문 내부의 향 좌측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 지국천왕과 검을 든 남방 증장천왕이


각각 악귀의 등을 밟아 누르거나 배를 짓밟은 채 서 있고,

향 우측에는 용과 여의주를 쥔 서방 광목천왕과 당을 쥐고 탑을 받쳐 든 북방 다문천왕이


악귀를 무자비하게 밟고 서 있다.
만공 기념관

천왕문을 나서자마자 우측에 만공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옹산 법광(1945~) 스님이 수덕사 20대 주지(2007~2001)로 소임하면서 건립한 기념관은 근대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 스님의 친필 서예와 만공 스님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정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대문의 문짝에 범종이 크게 그려져 있고,

건물 측면에는 덕숭총림 4대 방장을 지낸 송원 설정 스님이 쓴 만공기념관(滿空記念館) 편액이 걸려있다.

한편, 건물 밖 야트막한 담장 아래 작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전면에 송만공 대선사 구휼 송덕비(宋滿空大禪師救恤頌德碑)라고 새겨져 있다.
덕산면 8개 리(里)에 쏟아진 우박으로 재난이 발생하자 만공 선사가 이를 구제하기 위해 백미 17석(260원)을 베풀었는데, 덕산면 수백 호의 가구들이 이에 고마움의 뜻을 담아 12전(100전=1원)씩 모아 세운 송덕비로, 1999년 수덕사 인근 마을 주민의 제보를 받아 땅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굴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비석은 깨진 채 발굴되었으나 보수하여 세웠고, 전면 좌측 하단에 소화 6년(1931), 뒷면에 신미년(1931)이 새겨져 있어 송덕비의 연원이 1931년으로 확인되었으며, 1931년 5월 27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서도 정혜사 만공 선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건립 중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배치도

수덕사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황하정루, 대웅전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련당과 백련당을 배치하고 전면에 누각을 둔 ㅁ자 형태의 산지중정형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칠층 석탑

천왕문을 지나면 완만한 언덕에 만공 스님이 1931년에 건립한 석탑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살짝 비추고 있다.
원래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을 지금은 천왕문과 황하정루 사이 언덕 위로 옮겨 놓았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지대석 위에 바로 7층 탑신을 세우고 머리 장식을 올린 칠층 석탑으로, 1984년 충남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층 탑신 면에는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고 2층부터 7층까지의 탑신 면에는 우주가 표현되었으며, 2단의 받침을 가진 지붕돌은 반전을 심하게 하여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비교적 세련된 형태를 하였으며 머리 장식은 찰주, 보주, 보륜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끼리 석등

칠층 석탑 위 황하정루 아래에 세 마리의 코끼리가 떠받치는 석등이 자리하였는데, 얼핏 부도와 흡사한 모습을 하였다.
한편, 코끼리 머리와 등에 걸친 장식이 무척 이색적이고, 코끼리 등 위에 올려 놓은 하대에는 발이 달린 독특한 모습을 하였으며, 원형으로 제작한 석등의 화사석에 네 개가 아닌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놓은 것도 기발한 형태이다.
포대 화상

코끼리 석등 맞은편에는 포대 화상과 함께 다섯 동자승이 어우러져 활짝 웃고 있다.
황하정루

사천왕문을 지나면 사찰의 세 번째 산문인 황하정루가 나타난다.

송원 설정(11대~14대 주지) 스님이 시작한 불사는 1992년에 준공하였으나 대웅전의 전망을 해하고 환풍에 영향을 끼치기에 15대 주지로 부임한 법성 우성 스님이 이를 해체하고 다시 지어 1996년에 회향하였으며,

정면 9칸, 측면 3칸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 위에 정면 7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을 세운 중층 건물로,

1층은 통로를 포함해 사무실과 스님들의 요사로 사용하고, 2층은 강당이 마련되어 있으며, 지하 1층은 성보박물관인 근역성보관으로 조성하였는데, 2022년에 일주문 못미처 우측에 근역성보관을 다시 건립하여 이전한 뒤 지금은 폐쇄한 상태이다.

황하정루 정면 계단 중앙에 대해탈장(大解脫場) 글씨가 새겨진 돌판이 부착되어 있고,

황하정루 뒤편에는 누각 2층과 연결된 다리가 좌우로 설치되어 있다.

누각 정면에는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이 쓴 선지종찰 수덕사(禪之宗刹 修德寺)와 덕숭총림(德崇叢林) 편액이,

후면에는 원담 진성 스님이 쓴 황하정루(黃河精樓) 편액이 걸려있는데, 부처님의 정신이 거대한 강물처럼 도도히 흐른다는 의미로 황하정루라 하였다고 한다.

누하 통로에 수덕사 덕숭총림을 이끈 근대 선지식과 선지종찰로써 수덕사의 선풍 진작을 소개하는 불교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다.
경내 전경

단을 높여 조성한 넓은 터에 대웅전을 다른 전각에 비해 높게 지어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으로써 위엄있게 건축되었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을 가운데로 좌우에 청련당과 백련당을 배치하고 전면에 황하정루를 둔 산지중정형 가람배치를 이루었고, ㅁ자 형태로 생긴 중정에 삼층 석탑을 세웠으며, 좌우 요사 전면에 범종각과 법고각 및 조인정사와 종무소를 두어 전체적으로 대웅전을 기준으로 대칭적인 가람배치 형태를 하였다.
만공 스님이 수덕사 주지로 취임한 직후 선 수행 중심 도량으로 재편하기 위해 청련당과 백련당 그리고 조인정사를 정비하고 예불보다 수행에 중점을 둔 사찰로 변모하였다.
대웅전

대웅전은 1937년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를 통해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나 소박한 형태이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둥과 처마가 만들어낸 균형으로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가 특징이며,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장식을 절제하고 안정성과 내구성을 중시한 구조미가 훌륭한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에 고려시대 유행된 주심포집으로 짓고 맞배지붕을 올린 대웅전은 3칸 정면이 4칸 측면보다 폭이 더 넓다.

정면의 각 칸마다 빗살 3분합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에는 앞쪽 한 칸에 홑문을 설치하여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 후면에는 각 칸마다 문을 장식하였지만 가운데 칸에만 문을 설치하였다.

정면에는 달린 문은 섬세하게 조각된 빗살로 제작되었는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굵고 간결하여 절제를 통한 힘이 느껴진다.

측면에는 맞배지붕의 특징인 풍판(비바람을 막아주는 나무판)을 설치하지 않은 대신 지붕을 길게 빼내었는데, 이 때문에 서까래와 목부재의 아름다운 구도가 볼 수 있으며, 특히 지붕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은은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 인(人) 형태의 맞배지붕을 한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 건축 양식을 이은 대표적인 고려시대 건물로 건물 측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아름다운 것으로 무척 유명하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아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한편, 대웅전 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로 인해 땅이 파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축 아래에 빗물받이가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쓴 대웅전(大雄殿)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1589~1645)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편액은 1970년 말까지 법당에 걸었다가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이 쓴 대웅전 편액으로 바꿔 달았던 것을 최근에 다시 이광의 편액으로 고쳐 달았다.

대웅전은 주심포 맞배지붕을 올린 전각으로 내부 천장은 서까래가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가설되었는데,

연등천장은 가구 부재들이 아름다워 반자로 천장을 가리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구도미를 보여주는 고려시대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의 특징이다.
현재 대웅전 내벽은 회벽에 황토칠로 마감된 상태이다. 그러나 원래 대웅전 내벽에는 고려시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조선 중종 23년(1528) 그 위에 단청을 덧칠하여 벽화 속에 벽화가 있는 상태였다.
만공 선사가 1937년 대웅전 해체 수리 공사 중 이를 발견하였고, 이 벽화 묵서명에 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지대원년무신4월17일 입주)라는 기록에 의해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그려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대웅전을 해체하면서 벽화를 뜯어내 따로 보관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며, 당시 임천이 그린 모사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벽화는 모두 40점이 모사되었으며 건물의 결구 사이에 생긴 작은 공간에 그린 장엄용 벽화들로, 소불(小佛), 주악비천, 공양화, 나한, 극락조 등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내부 고주(높은 기둥) 사이에 불단을 조성하였는데, 하나의 수미단이 아니라 불상마다 개별로 육각 형태의 대좌형 수미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며, 저대석 위에 탁자를 얹어 놓은 형태로 보아 조성 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한 석가여래 삼존불상은 만공 선사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대웅전을 해체 수리한 뒤,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의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손의 위치를 달리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 차림이지만 오른팔을 드러냄으로써 17세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조선 인조 17년(1639)에 수연 비구를 비롯한 7명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확인되어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배치된 삼여래탱화이다.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과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화면 중앙에 표현되었고, 주변에 10대 제자, 8대 보살, 사천왕, 타방불 4위를 비롯해 천인 4구와 시자 4구가 묘사되어 있다.

불단 좌측 벽에 신중단을 조성하고 신중탱화를 걸었다.
탱화는 상, 중, 하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단에는 위태천 동진부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하였고, 하단 중앙에는 삼면 팔비의 모습을 한 예적금강이 자리하였으며, 중단에는 천부중과 함께 무장한 여러 신중을 배열한 39위 신중탱화이다.
한편, 대웅전 내부에는 신중, 칠성, 독성, 산신, 현왕탱화 및 지장시왕도가 걸려있었는데, 1993년 7월에 도난되었고 그중 지장시왕도는 회수되었으나 나머지는 아직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며, 도난된 탱화는 국가유산청 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첨부하였다.
신중, 현왕탱화


칠성탱화

독성, 산신탱화


삼층 석탑

대웅전 앞마당에 삼층 석탑이 세워져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머리 장식을 올린 삼층 석탑은

아래, 위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몸돌 중앙의 기둥인 탱주가 새겨져 있고, 탑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고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꼭대기 상륜부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노반)이 있고, 그 위에 머리 장식인 보륜과 보개가 올려져 있다.

지붕돌 귀퉁이의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어도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665)에 세웠다고 전하고는 하나, 통일신라 석탑의 전성기에 비해 기단의 가운데 기둥(탱주) 수가 줄었고, 지붕돌 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제작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석탑의 전체적인 양식과 조각 방법 등을 볼 때,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983년 충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청련당

대웅전 좌측에 스님들의 승방인 청련당이 자리하고 있다.

만공(1871~1946) 선사가 1924년 수덕사 주지로 부임한 뒤(조선총독부는 1934년에 인가함) 노후화된 건물을 수리하고 증축하면서 사찰의 규모가 확대되었는데, 특히 선(禪) 수행을 목적으로 1934년 청련당과 백련당 외에 조인정사를 건립하였다.
한편, 벽초 경선 스님이 1965년 견성암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이후 원담 진성 스님이 1974년 원래 자리에 남아있던 견성암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만공 선사가 지은 청련당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ㄱ자 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양쪽 모두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규모이고 공포를 두지 않고 민도리 양식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청련당은 원래 만공 스님을 비롯해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 공간이자 승방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하며 공양간이 건물 끝에 마련되어 있다.

청련당의 남측에 세계일화(世界一花) 현판이 걸려있다.
해방된 다음 날 만공 선사가 정혜사 뜰에 떨어진 무궁화꽃으로 세계일화를 쓴 것으로 좌측에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적어 놓았다.
근화(槿花)는 무궁화꽃이고 필(筆)은 쓰다라는 뜻이다.
만공 선사가 즐겨 쓰던 글귀인 세계일화는 당나라 왕유의 육조 혜능선사 비명에 나오는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에서 유래하며, 선종(禪宗)의 전등(傳燈)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로, 세계는 부처를 의미하는 하나의 꽃이고 그 꽃을 중국 선종 초조 달마 대사로부터 6조 혜능까지 여섯 명의 조사가 잎이 되어 받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청련당 서측 중정을 바라보는 곳에 청련당(靑蓮堂) 편액이 걸려있다.
만공 선사가 청련당을 지은 뒤 청련당 글씨를 써서 걸어 놓은 것으로, 편액 좌측에 2961(2961-1027=1934)을 써서 청련당이 1934년에 지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청련당 편액 아래 창방에 나무로 만든 거북이 장식물이 부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장수의 의미가 있고 예로부터 신성한 동물,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긴 거북이가 청련당 정면에 걸려있다.
목과 앞, 뒷발을 쭉 내밀고 있는 거북이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으며, 등껍질에는 육각형의 문양을 표현하였고, 머리에도 마름모 모양의 문양을 선으로 표현하였다.

청련당 내부에는 접견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공간이며, 벽에는 무이당(無二堂) 현판이 걸려있다.
무이당(無二堂)은 법화경의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성불(成佛)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요. 이도(二道), 삼도(三道)가 없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뿐인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는 수행자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백련당

대웅전 우측에 백련당이 자리하고 있다.
만공 선사는 승방을 목적으로 청련당을 지으면서 맞은편에는 제자 또는 스님들과 다담(茶談) 내지 환담(歡談)을 하면서 선문답이 오가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백련당을 지었다.

이후 인곡 법장(1941~2005) 스님이 1992년 주지에 취임한 뒤 덕숭총림 성역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불사를 전개하는 일환 중 하나로 백련당을 개축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도리 방향(동, 남, 서)은 각각 7칸으로 구성하고 보 방향은 2칸으로 된 ㄷ자 형태이며,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 목조 건축물이다.

건물 정면에 만공 선사가 쓴 백련당(白蓮堂) 편액이 걸려있으며, 좌측에 청련당과 동일한 二九六一 관지와 宋月面印(송월면인) 滿空(만공) 낙관이 있다.

백련당 아래에 범종각과 조인정사가 배치되어 있고, 커다란 나무 밑의 건물은 불교용품 판매점이다.
조인정사

조인(祖印)이란 선종에서 조사의 법맥을 인가하는 법의 인을 뜻하는 말이며, 정사(精舍)란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공부하는 집으로 조인정사는 의례 중심의 법당과 성격이 다르다.
조인정사는 선사가 머물며 법을 펴는 공간이자 조실의 법석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34년 만공 선사가 세웠으며, 이후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다시 지었다.

우측의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조인정사(祖印精舍)편액은 성당 김돈희(1871~1936) 선생의 글씨이고, 좌측의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조인정사는 덕숭총림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이다.
범종각

조인정사 앞에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집이며 기둥과 보(창방) 밑에 낙양각을 돌려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이 범종각(梵鐘閣)을 신축하고 편액을 써서 걸었다.

수덕사 범종은 무게 6500근(3.9톤), 높이 8척 5촌(2.58m), 둘레 14척 1촌 3분(4.28m)이며 계축년(1973)에 조성되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최초의 범종으로 경내에 주조 공장을 설립하고 원담 진성 스님이 조성하였다.

종을 치는 나무(당목)가 물고기 형상을 하였는데 벌린 입으로 나무를 물고 있다.

음통을 등에 짊어진 용이 두 다리와 턱주가리로 천판을 단단히 붙들었고,
천판 밑에는 당초문을 두른 상대에 이어 9개의 종유가 있는 유곽이 사면에 배치되었으며,

유곽 아래에는 2개 당좌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 4구가 새겨져 있는데,

구름 위 연꽃에 무릎을 꿇고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과 서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으로, 여성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천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오로지 천인(天人)인데 범종에 묘사된 비천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범종 양식을 따라 제작하였는지 그 시대에 유행하던 여신(女神)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범종각 맞은편에 법고각과 종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법고각

원담 진성 스님이 범종각을 신축할 때 법고각도 함께 지으면서 사물을 조성 봉안하였으며,

기둥과 보(창방) 아래를 범종각과 동일한 형태의 낙양각으로 장식하고 법고각(法鼓閣) 편액을 걸었다.

법고각 중앙에 법고와 함께 법고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법고보다 법고대에 눈길이 더 간다.

법고대는 거북등과 사자(?) 다리에 용머리로 구성되었으며, 거북이 등껍질에 안장을 그리고 그 위에 연잎을 세워 법고를 떠받치고 있다.

법고대의 용이 머리를 돌려 법고 둘레(북통)에 그려진 용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생동감있게 표현하여 재미있다.

법고 좌측에 배치된 운판은 바람 위에 구름을 몽실몽실하게 표현하고 중앙에 연꽃이 활짝 핀 당좌를 넣은 형태이다.

법고의 우측에는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난 목어가 매달려있고,

목어 뒤편에 작은 종을 걸어 놓았다.
종무소

법고각 뒤로 정면 7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은 종무소가 자리하였고, 정면에 조인정사에 걸려있던 수덕사 편액을 옮겨 걸어 놓았다.
명부전

대웅전 좌측에 배치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원담 진성 스님이 신축하였으며

전각 정면에 명부전(冥府殿) 편액 글씨를 써서 걸었다.

전각 안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독존으로 봉안하고 삼면 벽을 목각탱으로 둘러 장엄하였다.

지장보살이 팔각 대좌 위에 통견 차림으로 결가부좌하고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보주를 받쳐 들고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하고 있다.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지장시왕도를 조각한 지장시왕 목각탱으로, 화면 상단 중앙에 지장보살을 두고 앞쪽 좌우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주변에는 열 분의 시왕을 비롯해 판관, 녹사, 사자, 옥졸 및 여러 권속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으며,

좌우 벽면에는 각각 다섯 분씩 모두 열 분의 시왕이 망자를 판결하는 장면을 조각한 시왕 목각탱으로 장엄되어 있다.
관음 바위

백련당 문 앞에 집채만 한 바위 버티고 있는데 이를 관음 바위라고 한다.
다소 특이하다 싶으면 무언가 얘깃거리를 만들려는 속성이 있는 듯하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가람이 퇴락하여 중창불사를 해야 했으나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한 여인이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지라 수덕 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면서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청혼하기까지에 이르자 이 불사가 원만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여인의 말에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 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 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달라며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는데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버선꽃(골담초)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사라진 이곳에서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는데, 수덕사는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 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구전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한 가피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인곡 법장(1941~2005)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 1994년 이 자리에 관음보살을 조성하고 바위 위쪽에 관음전을 지었다.
이후 관음보살은 최근 이 자리에서 바위 위로 이전하여 노천 관음전으로 새롭게 조성하고 관음전은 삼성각으로 바꾸었다.
노천 관음전

관음 바위가 잘 보일 수 있도록 관음보살의 크기를 작게 하여 세우고 노천 관음전을 조성하였다.

보관을 쓴 머리에 백의를 걸친 관음보살이 구름 위에 서서 왼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감로병을 기울인 모습을 하였다.
특히 관음보살을 떠받치는 대좌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두 마리 용이 구름을 뚫고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는 장면으로 조각되어 있다.
삼성각

노천 관음전 위에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원래 운경 법정(1944~) 스님이 19대 주지(2003~2007)로 취임한 뒤 복원한 관음전이었으나 2022년에 삼성각으로 교체하였다.

전각에는 덕숭총림 4대 방장을 역임한 송원 설정(1944~) 스님이 쓴 삼성각(三星閣) 편액을 걸었고,

내부에는 2022년에 조성한 칠성, 독성,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다.
칠성탱화

화면 중앙에 금륜을 받쳐 든 치성광여래를 두고 앞쪽 좌우에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여 삼존을 구성하였으며, 주위에는 칠여래와 칠원성군을 비롯해 7명의 시자가 배치되었다.
독성탱화

계곡물이 흐르는 산속에 소나무를 등진 독성이 한 손으로 불로초를 들고 앉아 있고 물 위에는 영기를 내뿜는 거북이를 머리를 돌려 독성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뒤편에는 향을 태우는 향로가 놓여있고 그 위에 파랑새 두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게 보인다.
산신탱화

산신탱화의 배경과 주변 환경은 독성탱화와 동일하지만 등장 인물의 묘사가 다르다.
투명한 망건을 쓴 산신이 기다란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순하게 생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시냇물 건너에 서 있는 보살과 무언가 말을 하는 장면을 그렸고, 그 옆에는 커다란 도토리 같은 공양물을 든 동자가 미소를 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개산조 지명법사 비

삼성각 옆 담장 앞에 수덕사를 창건한 지명법사의 비가 서 있다.
옹산 법광(1945~) 스님이 20대 주지(2007~2011)를 취임한 뒤 대웅전 건립 700주년 행사와 더불어 세운 수덕사 개산조 지명법사의 비이다.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 때 지명 법사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에 따르면 백제 말에 숭제 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명 법사의 창건은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
한편,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익산 용화산 사자사에 지명 법사가 주석했다는 기록이 흥미롭다. 물론 위덕왕 때의 개산조 지명(知命) 법사와 무왕 때의 지명(智命) 법사는 한글 표현이 같지만 한자 이름이 다르다.
노사나불 괘불탱

수덕사에 있는 이 불화는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10대 제자와 12대 보살을 비롯해 여러 무리를 그린 노사나불 괘불탱으로 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머리 광배에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는 명칭이 그려져 있고, 신체에 비해 설법인의 수인을 표현한 두 손을 크게 강조한 것이 특징이며,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10대 제자를, 중단과 하단에 걸쳐 12대 보살,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고, 최상단에 타방불과 보살 비천 등을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 14년(1673)에 제작된 이 불화는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으로,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하여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부도

일주문 못미처 우측에 부도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 원담 스님의 부도를 크게 모조하여 표지석으로 세워 놓았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1971년부터 수덕사의 교구본사로서 사격을 유지하기 위해 대내외적인 노력을 기울인 원담 스님은 근대 선맥의 상징인 경허 스님의 사상을 고취하고자 경허 스님의 부도를 조성하여 밖으로 큰 스님들의 선풍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 그 선지를 면면히 계승하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수덕사를 현재의 덕숭총림으로 지정하여 가람수호와 산중의 화합에 매진하는 한편, 납자의 탁마(琢磨)에는 시처를 가리지 않았으니 근대 불조의 맥을 잇는 선지식이다.
그 결과 부도밭 입구에 그의 부도로 표지석을 삼은 듯하다.

만공 스님의 부도는 정혜사 가는 길에 세워져 있고 이곳에는 덕숭총림 방장을 지낸 스님들의 부도를 중심으로 몇 기의 부도로 구성되어 있다.

종전에 부도밭에 나뒹굴던 부재를 모아 사리탑 형식으로 재현하였고 그 옆에 배 깔고 엎어져 있는 소 역시 한 켠에 있던 부재의 일부였다.

좌측부터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 현문(1884~1985), 2대 방장 벽초 경선(1899~1986),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이다.
한편, 수덕사 덕숭 문중은 만공 스님의 유훈을 받들어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 외 몇 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염불원 뒤 언덕에 특이한 나무가 공생하며 자라고 있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소나무가 터잡고 자라고 있거나, 아니면 소나무 하나를 두고 두 나무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서로 불편하지 않고 사이좋게 잘 사는 것 보면 다툼 많은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산 수덕사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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