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보종찰 순천 조계산 송광사 2부에 이어 3부 수선사와 보조 국사 부도 편을 시작합니다.
고려 중기의 불교는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하여 선교 양종을 봉합한 듯 보였으나 국사가 입적하자 선교 양종의 대립은 물론이고 교종 내 각 종파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 무신정권이 등장하면서 왕권이 약해지고 문신 귀족이 몰락하자 불교계의 주류는 귀족 중심의 교종에서 무신과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선종으로 교체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무신 권력과 결탁하면서 이권 개입을 하며 명리(名利)를 쫓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자 지방에서는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결사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앙 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종에서는 지눌의 수선사이고, 천태종에서는 요세의 백련사였다.
지눌은 의종 12년(1158)에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한 뒤, 1165년 7세에 조계 혜능의 후손인 대선사 종휘에게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명종 12년(1182) 지눌은 승과에 합격했으나, 선불장(승과장)에서 분란이 발생하자 출세를 포기하고 남쪽지방을 돌아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에 창평(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청원사에 머물면서 육조단경으로 1차 깨달음을 얻었고, 명종 15년(1185)에는 하가산(지금의 경북 예천군 학가산) 보문사로 옮겨 은거하면서, 화엄경의 여래출현품과 이통현의 화엄론을 보고 2차로 깨달았다.
얼마 후 득재 선백의 요청으로 공산 거조사로 간 지눌은 동지를 모아 명종 20년(1190) 법회를 열고 정혜결사를 결성하여 정혜사라 하였는데 모여드는 인파로 장소가 부족하자 제자인 수우에게 송광산에 있는 길상사를 중수하도록 하고 자신은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신종 1년(1197) 대혜보각선사어록을 보고 3차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신종 3년(1200)에 길상사로 거처를 옮겼으며, 길상사의 중수가 끝난 희종 1년(1205) 약 120일 동안 경찬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이 명을 내려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정혜사(길상사)를 수선사로 개칭하였다.

대웅전 뒤 담장이 둘러쳐진 곳에 수행 공간인 하사당, 상사당, 수선사가 자리하고 있다.
보물 순천 송광사 하사당

하사당(下舍堂)은 1999년 보수 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 세조 7년(1461)에 처음 지었고, 1669년과 1899년에 중수했음이 밝혀졌으며,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의 조선 전기 건축 구조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담장 보수 공사로 주변이 무척 어수선하다.
하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앞면은 겹처마인 반면 뒷면은 홑처마이며, 좌측 두 칸은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으로 꾸몄고, 우측 한 칸은 부엌인데, 지붕 위에 환기 구멍을 내고 솟을지붕을 올린 특이한 구조를 하였다.
이런한 형태는 송광사 외에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송광사의 임경당 지붕에도 이 구조를 적용하였다.
예전에는 하사당은 신참 납자가, 상사당은 구참 납자가 수행하는 선방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순천 송광사 상사당

하사당 바로 위 터를 높여 상사당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이며, 좌측 두 칸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우측으로 시자실로 사용하는 건물이 이어져 있다.

정면에 상사당(上舍堂) 편액을 걸고 좌우에 세계일화(世界一花)와 조종육엽(祖宗六葉) 편액을 걸었으며, 밑에 미소실(微笑室) 편액이 걸려있다.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면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마하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지었다는데서 유래된 염화미소는 현판 이름에 염화실, 미소실 등으로 자주 쓰인다.
세계일화 조종육엽이란,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뜻이고,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내려온 중국 선종의 전등(傳燈)을 표현한 말로, 중국 당나라 왕유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의 구절에 등장한다.
편액 좌측에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있어 추사 김정희의 글씨임에는 틀림없지만 원판은 아니다.
만허 스님이 하동 쌍계사에 있을 때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추사가 이 글씨를 써서 보내자 하동 쌍계사의 육조정상탑에 편액으로 걸었다. 이것이 원판이다.

전각 뒤에 삼일암(三日菴) 편액이 걸려있다.
삼일암은 송광사 16국사 중 9세 자오 국사 담당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한 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일암(상사당)과 하사당 뒤로 설법전(좌), 대웅전(중), 응향각(우) 등의 지붕이 보인다.
전남 유형문화유산 순천 송광사 응진당

상사당 위 시자실 옆에 응진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처음 지었으며 1623년 중수 이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초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 건축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 충분하여 2001년 전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짓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하였으며,

창호의 문틀을 크게 하고 문짝은 작게 하였으며, 문짝 아래 궁창에 삼태극을 그려 넣었다.
석가모니 삼존불

석가모니불이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에는 보관을 쓴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손의 위치를 달리하여 기다란 연꽃 가지를 쥐고 서 있다.
16나한상

삼존불 좌측에 마하가섭존자에 이어 나한 8구, 제석천, 사자, 인왕이 배치되었고,

우측에는 아난존자와 나한 8구, 범천, 사자, 인왕이 배치되었다.
보물 순천 송광사 응진당 석가모니 후불탱 / 십육나한탱, / 제석 범천탱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좌우에 걸려있는 16나한도 및 제석천과 범천탱화는 1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도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등 당시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산회상도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조선 영조 원년(1724)에 제작된 영산회상도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한 석가오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16나한도 / 제석, 범천탱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서열이 홀수의 존자는 좌측에, 짝수의 존자는 우측에 배치하였는데,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에 맞춰 화면 크기가 다르고 화면의 구성 인물수도 각각 다르게 그렸다.




좌측에는 나한도 3폭과 제석천, 사자, 인왕을 그린 제석천탱이 걸려있고,




우측에는 나한도 3폭과 범천, 사자, 인왕을 그린 범천탱이 걸려있다.
순천 송광사 설법전 / 수선사
설법전은 선(禪)을 행하는 수선 도량(修禪道場)으로 수선사와 함께 송광사를 대표하는 전각이다.

응진당 향 우측에 설법전과 수선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인은 출입을 금하고 있다.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자는 실천 운동이었으며, 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다.
인간의 본심을 깨달으면 제불(諸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 하고, 비록 돈오하여도 습기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지속적인 수행)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또 화엄사상을 도입해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 두 문은 아직도 지해(知解)와 어로(語路)의 자취를 벗어난 것이 못되므로 이러한 지해의 장애를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선문(禪門)의 활구를 참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눌의 선에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은 바로 이러한 간화의 출신 활로를 가리키고 있다.
성적등지, 원돈신해, 경절 등 3문으로 이루어진 지눌의 선(禪)의 실천 체계는 대단히 독창적인 것이다.
선문에서는 지해라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지눌은 그것을 원용하였으며, 그것도 혜능의 적자가 아닌 하택 신회, 규봉 종밀의 것을 도입하였다.
화엄에서도 현수, 청량 계통이 아니라 방계인 이통현의 것을 채택하였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대혜 종과의 간화선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선 사상을 펼쳤다.
이로써 수선사의 지눌 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완성된 철학체계를 마련함으로써 고려 불교사의 기본적 과제인 선교통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으며, 지눌의 뒤를 이어 제2세 혜심이 지눌의 선 사상을 계승해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선양함으로써 고려 불교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전남 유형문화유산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 비

관음전 뒷뜰 언덕에 불일 보조국사 지눌의 감로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과 탑비이다.
보조국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 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 지도자였으며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으로, 16 국사를 배출한 수선사의 제1세이다.

고려 희종 6년(1210) 보조국사 지눌이 열반하자 왕이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내렸으며, 3년 뒤인 강종 2년(1213)에 탑을 세웠다.
이후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현재 원래의 위치에 있으며,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 가치가 있어 2001년 전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대좌를 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대좌를 올려 놓은 매우 특이한 형식을 하였다.
연꽃을 새긴 복련석이 둥근 몸돌을 받치고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렸으며, 둥근 공 모양의 몸돌과 지붕돌 처마의 귀솟음으로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감로탑 옆에 오세창(1864~1953) 선생이 쓴 탑비(좌)가 세워져 있다.
전면에 고려 희종 6년 경오 증 시(諡), 불일 보조국사 감로지탑, 위창거사 오세창 서라고 새겨져 있다.
우측의 비는 원래 고려 희종 6년(1210)에 처음 세웠던 것을, 조선 숙종 4년(1678)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82년 전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문에 지눌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8세에 출가하여 34세에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멀리하며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지눌은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다 송광사에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선종을 크게 일으켰으며, 희종 6년(1210) 53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그를 국사로 추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산신각

설법전 뒤 언덕에 산신각이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에는 산왕대신지탱이라고 쓴 산신탱화가 걸려있다.
산신이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부채와 표주박이 매달린 지팡이를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호랑이를 타고 어디론가 행차하며, 앞뒤로 시자가 공양물을 들고 함께 따라가고 있다.
순천 송광사 목우헌 / 국사전 / 풍암 영각

지장전 뒤 담장 너머로 목우헌이 보인다.
목우헌은 보조국사 지눌의 호인 목우자(牧牛者)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문에 걸려있는 불일문(佛日門) 역시 지눌의 시호를 딴 이름이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제일 먼저 목우헌이 자리하고 이어 행해당과 차안당, 국사전과 풍암 영각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수행 공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국보 순천 송광사 국사전

국사전은 국사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인 이 건물은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건축물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보물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 진영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16 고승들의 초상화이다.
16점 모두 조선 정조 4년(1780)에 안치되었으며, 규모나 제작 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중기 불교 초상화의 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어 199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5년 도난당하여 현재 송광사에는 3점만 남아 있고, 나머지 13점은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수선사 1세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



2세 진각국사 혜심(1178~1234) 3세 청진국사 몽여(?~1252) 4세 진명국사 혼원(1191~1271)



5세 원오국사 천영(1215~1286) 6세 원감국사 충지(1226~1293) 7세 자정국사 일인(?~?)



자각국사 도영(?~?) 9세 담당국사 성징(?~?) 10세 혜감국사 만항(1249~1319)



11세 자원국사 경린(?~?) 12세 혜각국사 묘구(?~?) 13세 각진국사 복구(1270~1355)



14세 정혜국사 복암(?~?) 15세 홍진국사 선현(?~?) 16세 고봉국사 법장(1350~1428)
전남 유형문화유산 순천 송광사 풍암 영각

국사전 바로 옆에 자리한 전각에 풍암 영각(楓巖影閣) 편액을 걸고 풍암(1688~1767) 스님 문하 19세기 중엽의 큰스님들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철종 3년(1852) 원래 지금의 도성당 자리에 진영각을 지었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이며 1982년 전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순천 송광사 도성당

승보전 뒤에 스님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는 도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진영각이 있었는데 국사전 옆으로 옮기고 도성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정면에는 담장을 따라 대나무가 일렬로 심겨 있는데,

담장을 끼고 돌아서면 노랗게 핀 산수유가 분위기를 화사하고 밝게 한다.

산수유가 담장 밖으로 숙이고 있어 사진찍기에 불편이 없다.

도성당 옆에 불일 국제선원으로 운영되는 중현당과 대지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현당은 2층집이고, 대문 우측의 대지전은 ㄷ자형 건물로 모두 특색있게 지어졌다.
순천 송광사 효봉 영각

효봉 영각 앞에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올린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무무문(無無門) 편액이 걸려있고, 문을 통해 뒤로 효봉 영각이 보인다.

내부에는 쉴 수 있도록 널빤지를 기둥 사이에 설치해 놓았다.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당 학눌 대종사의 사리탑이 특이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연꽃이 조각된 대좌와 기와를 조각한 지붕돌이 아래위로 마주 보고 그사이에 탑신이 길게 세워져 있어, 처음 볼 때는 이것이 사리탑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조형물로 착각하게 된다.

사리탑 뒤로 영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짓고 풍판을 달았으며,

정면에 효봉 영각(曉峰影閣) 편액을 걸었다.

영각 좌측에 조계사조 종정 효봉당 학눌 대종사라고 쓴 비가 세워져 있다.
효봉당 학눌(1888~1966) 스님은 판사 출신의 스님이며, 송광사에서 대종사 직위를 받았고 1962년 조계종 초대 종정에 선출되었으며,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입적한 뒤, 사리와 정골을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자재원

승보전 앞에 자리한 자재원은 본래 박물관이었는데 지금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해우소

자제원 옆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丁자 형태의 해우소를 지었다.

물 위에 해우소가 있는 사찰은 송광사가 유일할 것이다.
물로 방출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악취가 발생하여

지금은 보수 중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상으로 순천 송광사를 모두 마칩니다.
순천 송광사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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